2016년 12월 6일 화요일

삼채마상
당삼채(唐三彩)는 중국 당대의 도기로 삼채 유약을 사용한 것을 말한다.
주로 장안·낙양 귀족들의 장례용으로 제작되었고, 묘릉에 부장되었다. 서안의 당삼채는 서요(西窯)라 칭하고, 낙양의 것은 동요(東窯)라 칭한다. 도질(陶質)의 소지에 화장한 다음 녹·갈·황·백의 연유로 화려하게 칠하였으며, 또는 코발트의 남유(藍釉)를 칠한 것도 있다.백색 점토를 기본 재료로 하고 납과 알루미늄을 함유한 산화물을 용제로 하여 900도 정도의 저온에서 구워낸다. “삼채”(三彩)는 세 가지의 색채만을 사용한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색채를 뜻한다. 그러나 대체로 황색, 녹색, 백색으로 색칠되어서 당삼채라 일컫는다.
기형은 용수호, 만년호와 반(盤), 완 외에 여러 가지 형태의 남녀 인물상, 신상, 진묘수(鎭墓獸), 말, 낙타 등의 각종 명기. 당대 귀족의 취미, 생활양상을 잘 나타내고 또 당시 유행한 서아시아풍 의장과 복식이 가끔 보인다. 당샘채는 남북조 시대 때 시작되어, 당나라 때 성행하였다. 아마도 측천무후(재위 690∼705) 경부터 출현하여 후장(厚葬)의 풍습이 높아짐에 따라 크게 유행하였으나, 안록산의 난(756) 이후에는 제작되지 않았다.
당나라뿐만 아니라, 인도, 일본, 한국, 이란, 이라크, 이집트, 이탈리아 등 해외까지도 수출이 되어 높은 명성을 얻었다.발해삼채, 요삼채, 송삼채 등과 페르시아 삼채 등에까지 그 영향이 미쳤다고 한다. 일본 나라시대(奈良時代) 때, 중국의 삼채를 모조하여 만든 도기(陶器)를 “나라삼채”라 하고, 신라시대 때 삼채를 모조하여 만든 도기를 “신라삼채”라고 한다.실크로드, 지중해 연안 국가에서 발굴된 것으로 보아, 당삼채는 서양의 도자기에도 작지 않는 영향을 끼쳤다. 그러기에 당삼채는 동서양을 이었던 중요한 문화물이라 할 수 있다.

월정사 팔각 구층 석탑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 계곡 월정사 경내에 남아 있는 월정사팔각구층석탑(국보48호)이다. 경천사지석탑과 함께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석탑이다. 고려시대 다각다층석탑은 평면형태가 육각 또는 팔각이며, 층수은 5,7,9,13층을 하고 있다. 다각다층석탑은 고구려나 중국의 다층목탑 형태를 계승한 것으로 보이며, 주로 북부지방에 많이 조성되었다. 사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통일신라석탑이 안정적이고 균형미를 강조하고 있는데 반해 다각다층석탑은 수직성이 강조되고 있다. 전체적인 비례와 조각수법이 뛰어나며, 고려초 불교문화의 화려하고 귀족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석탑은 8각모양 2단 기단 위에 9층의 탑신을 올렸다. 탑신은 1층 탑신에는 불상을 모신 감실을 두고 있으며, 2층부터 거의 같은 높이를 유지하고 있다. 탑신위에 상륜부 머리장식이 온전히 남아 있는데, 청동으로 만들어진 풍경과 함께 고려시대 금속공예 수법을 살펴볼 수 있다. 석탑 앞에는 탑을 향해 오른쪽 무릎을 꿇고 탑에 공향을 하고 있는 보살상이 같이 있다. 보물 139호로 지정된 원래의 석조보살좌상은 월정사 성보박물관에 모셔있고, 현재는 새로 만든 보살상이 놓여 있다.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 기슭에 위치한 월정사는 643년 자장율사(慈藏律師, 590∼658)가 당나라에서 사리와 대장경일부를 가지고 돌아와 통도사와 함께 창건했다고 한다. 오대산(五臺山)은 문수보살이 머무는 곳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세조가 크게 중창한 상원사와 함께 월정사는 왕실과 관련이 있는 원찰의 기능을 했던 사찰이다. 오대산 깊은 산중에 위치해 있지만 팔각구층석탑을 제외하고 대부분 전각들은 한국전쟁으로 불타버려오래된 건물은 남아 있지 았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국보48호, 강원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로
국보 제48호 월정사팔각구층석탑이다. 이 석탑은 고려초기 석탑을 대표하는 다각다층석탑으로 석탑 앞에는 공양하는 모습의 석조보살좌상이 마주보며 앉아 있다. 고려시대가 되면 4각형 평면에서 벗어난 다각형의 다층(多層)석탑이 우리나라 북쪽지방에서 주로 유행하게 되는데, 이 탑도 그러한 흐름속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고려 전기 석탑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탑은 8각 모양의 2단 기단(基壇) 위에 9개의 몸돌과 지붕돌로 구성된, 즉 9층의 탑신(塔身)을 올린뒤,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 모습니다. 아래층 기단에는 안상(眼象)을 새져 놓았고, 아래.위층 기단 윗부분에는 받침돌을 마련하여 윗돌을 괴어주도록 하였다. 탑신부는 일반적인 석탑이 위층으로 올라 갈수록 급격히 줄어드는 모습과 달리 2층 탑신부터 거의 같은 높이를 유지하고 있으며, 1층 탑신의 4면에 작은 규모의 감실(龕室, 불상을 모셔두는 방)을 마련해 두었다. 지붕돌은 밑면에 계단 모양의 받침을 두지 않고 간략하게 마무리하였고, 가볍게 들려있는 여덟곳의 귀퉁이마다 풍경을 달아 놓았다. 지붕돌 위로는 머리장식이 완벽하게 남아 있는데, 아랫부분은 돌로, 윗부분은 금동으로 만들어서 화려한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당시 불교문화 특유의 화려하고 귀족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전체적인 비례와 조각수법이 착실하여 다각다층석탑을 대표할 만하다. 또한 청동으로 만들어진 풍경과 금동으로 만들어진 머리장식을 통해 고려시대 금속공예의 수법을 살필 수 있어 더욱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출처:문화재청>

경주 불국사 다보탑
한국의 어떤 다른 석탑과도 닮지 않은, 독특한 아름다움을 가진 석탑으로, 목조 건물의 복잡한 구조를 화강석을 이용해 아름답게 표현하였다. 또한 경쾌하면서도 장려하고 번잡한 듯하면서도 전체의 통일이 잡혀 있으며, 돌을 자유자재로 다룬 기법은 놀랄 만한 것으로, 이러한 형식의 탑은 중국과 일본 등 다른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